사랑하온 저의 주님, 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당신 외엔 가진 것이 없는 아주 작은 민들레가 되게 해 주십시오. 피었다가, 피었다가 드디어는 하얗게 머리를 풀고 당신의 오심을 고대하는 행복한 민들레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당신의 사랑 안에서 그 작은 민들레는 모든 꽃들과 함께 영원을 노래할 것입니다.
― 16쪽, 1부 ‘어느새, 봄 속으로’ 중에서
주님. 저는 언제나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무슨 차에든지 한번 타기만 하면 그저 끝없이 어딘가를 향해 자꾸만 가고 싶은 마음이에요. 산과 들마다 어려 있는 당신의 그림자를, 덜 낯선 이웃의 마음 안에도 가까이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언제나 사랑하면서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 45쪽, 1부 ‘어느새, 봄 속으로’ 중에서
오늘 F 수녀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자매가 제게 불만스러워 하는 점을 전해 들었습니다. 말이 간접적으로 전달된 것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다행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앞으로 더 조심할 수 있으니까요.
아마도 제 행동이 너무 느리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던 모양인데,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일을 민첩하게 척척 해내지 못하는 데다 언제나 생각에 깊이 잠겨 현재를 잊어버리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 87쪽, 2부 ‘풍덩, 여름의 한가운데로’ 중에서
오랜만에 옥상에 올라갔더니 한쪽에 몇몇 수녀님들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화단에 하얀 도라지가 웃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크게 열려 있고, 구봉산이 제법 푸르게 위엄을 떨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수박을 흥정하는 아낙네들이 보이고,
‘초원 다방’, ‘왕 개미 의상실’ 등 숱한 간판들이 눈에 띄고,
바람을 마시러 밖으로 나오는 여러 이웃의 얼굴이 보입니다.
모두 살아 있는 모습들이죠.
― 115쪽, 2부 ‘풍덩, 여름의 한가운데로’ 중에서
포도를 따 먹은 손에서는 아직 달콤한 향기가 배어 나옵니다. 익어서 더욱 아름답고,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열매와 같이 저도 당신 안에서 익어 가는 영혼이 되게 하소서.
주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혼자서 성숙할 수 있습니까? 오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외우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 162쪽, 3부 ‘훌훌, 가을을 건너며’ 중에서
저의 이 검은 수도복이 실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벗기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나.
수도복을 입지 않은 이들보다 더 열심히 한 것도 없고, 더 사랑하지도 믿지도 못하면서 ‘수녀’라는 사실 때문에 받는 대우에 익숙해져서 때로는 정말 무엇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 언제나 제가 아직 수도복을 받지 못했을 때의 그 배고픔과 갈망과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184쪽, 3부 ‘훌훌, 가을을 건너며’ 중에서
진정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구태여 남이 알아주는 큰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얼른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만 민들레가 되고 싶다 해 놓고도 장미의 화려함을 부러워하고, 남에게 필요 이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제 은밀한 교만이 늘 부끄러울 뿐입니다.
― 205쪽, 4부 ‘그래도, 겨울을 견디며’ 중에서
시인은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모으고 나누어 주는 수집가이자 전달자임을 다시 알게 되는 요즘.
나는 늘, 그래서, 깨어 있고 싶다.
간밤 꿈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보여 너무 행복했다.
내용은 잊었어도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환희심을 싹트게 하는 나의 어머니, 엄마.
― 237쪽, 5부 ‘기꺼이, 다시 봄으로’ 중에서
아버지. 제가 참된 사랑의 의미를 알아듣고, 행하도록 언제나 도와주십시오. 아낌없이, 몽땅, 저 가진 것 전부를 얼마 되지 않는 그대로 당신과 나의 이웃을 위하여 기꺼이 바칠 수 있도록 은총 주시고, 제가 당신 아닌 헛된 물건이나 사람과 우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 260쪽, 부록 ‘종신 서원을 준비하며’ 중에서
주님.
당신께서 제 이름을 불러 주신 뒤에는
모든 초조함이 사라졌습니다.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온 누리가 새로운 옷을 입고
저도 새 옷을 입고
이제 부활하신 당신을 가슴에 지니고
형제들에게 뛰어가는
이 파도 같은 기쁨을 어이합니까.
― 287쪽, 부록 ‘종신 서원을 준비하며’ 중에서